1966 ~ 1985

1.
원사 메이커를 향한 꿈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역사는 발전한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그 격동의 한복판에서 희망의 실낱 하나를 추슬러 SK그룹의 모태이자 SK케미칼의 원형을 세웠다. 1953년 잿더미 위에서 선경직물을 일으킨 그는 1966년 1월 선경 5개년 사업계획 수립으로 원사사업 진출의 의지를 공식화했다.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우선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1966년 6월 선경화섬 설립을 통해 사업을 본격화했다. 이후 사업 추진과정에서 데이진과의 인연은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일류기술이 아니면 장래성이 없다’는 일념으로 데이진의 문을 두드려 1968년 3월 ‘폴리에스터 사업 합작투자에 대한 기본협약’을 체결하고 국내 최고 원사 메이커를 위한 닻을 올렸다.

1. 선경 5개년 사업계획 수립 1966

가장 크게 빛나는 기업, 선경의 첫발
한국전쟁 폐허 속에서 추스른 희망의 실낱
섬유입국 초석 세우며 경제재건의 토대를
직조하다.

  • 1953년 3월, 전쟁통에 폐허가 된 수원 평동의 선경직물 공장터는 고요하다 못해 황량하기만 했다. 잿더미가 되어 을씨년스러운 공장의 모습에 최종건 창업회장은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만 18세 때부터 청춘과 열정을 바쳤던 공장은 활기를 감춘지 오래였다.
  • _ 1953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원 평동 선경직물 공장과 파손된 직기

    _ 1953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원 평동 선경직물 공장과 파손된 직기

  • _ 수원 선경직물 공장 설치된 직기

    _ 수원 선경직물 공장 설치된 직기

  • 청년 최종건 회장은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잿더미 속에 묻혀 있던 직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관재청의 관리인들도 외면해버린 공장 재건을 위해 첫 삽을 든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옛 동료들도 모여들었다. 함께 인근 광교천에서 자갈과 모래를 실어와 벽돌을 만들고, 흩어져 있던 직기 부속품들을 모았다. 그렇게 복구한 기숙사 건물에 직기 4대를 재조립해 설치했다. 1953년 5월 초순의 일이었다. 다시 두 달이 흘러 7월까지 새로 15대의 직기를 재조립해 20대의 직기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 _ 1953.10 수원 평동 선경직물 본사

    _ 1953.10 수원 평동 선경직물 본사

  • _ 1955 SK의 첫 히트 상품인 닭표 인조견 / 봉황새 이불감

    _ 1955 SK의 첫 히트 상품인 닭표 인조견 / 봉황새 이불감

  • 동시에 관재청으로부터 매각이 결정된 선경직물의 불하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장 인수대금을 마련할 길은 없었다. 다행히 장남의 집념을 저버릴 수 없었던 부친의 도움을 종잣돈으로 하여 우여곡절 끝에 1953년 9월 30일 선경직물 공장 매수를 완료했다. 그리고 10월 1일 정식으로 ‘선경직물 창립일’을 선포했다. 말 그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것이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폐허 속에서 주워 모은 직기 부속품과 고철들은 희망의 실낱이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한줄기 실낱 같은 희망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선경직물을 일궈냈다. 맨 주먹 하나로, 불굴의 도전정신과 ‘하면 된다’는 굳은 신념으로 이뤄낸 기적이었다.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을 합쳐 만들었던 이름 ‘선경’을 ‘빛날 선(鮮), 클 경(京)’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도 작게는 이제 첫발을 내딛는 스스로와 구성원들에게, 크게는 암울했던 시절의 절망밖에 가진 것이 없었던 우리 이웃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한 원대한 기상의 발현이었으리라. 선경직물은 닭표 안감, 봉황새 이불감, 곰보 나일론, 크레퐁, 앙고라, 조제트 등의 상품들을 잇달아 출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50년대 말 선경직물은 이미 우리나라 직물업계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원사난은 골칫거리였다. 늘 충분한 원사를 확보하지 못해 판매가 잘 돼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강의 상류에 물이 마르면 하류에 물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직물공장은 원사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제대로 제품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원사공장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갔다. 더욱이 1958년 한국청년회의소(JC) 회원 자격으로 일본의 직물공장과 원사공장을 둘러보고 기술의 차이를 절감하면서 원사공장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실현해내야 하는 목표로 구체화해 갔다.

원사사업의 진출!
모두가 안 된다고 했지만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 1964년 10월 15일 수원 평동의 선경직물 공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제1회 수원의 날’ 기념행사에 참석한 후 선경직물 공장에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최종건 창업회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선경직물은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폴리에스터 사업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은 규모가 워낙 크고 첨단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우선 규모가 작은 아세테이트 원사공장부터 지으려고 합니다.”
  • _ 박정희 대통령 선경직물 방문

    _ 박정희 대통령 선경직물 방문

대통령 앞에서 아세테이트뿐 아니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계획까지 밝힌 것은 적지 않은 모험이었다.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합섬분야 원사공장이 포함되면서 이미 국내 직물업체들은 나일론ㆍ폴리에스터ㆍ아크릴 원사공장 건설에 나선 상황이었다. 1963년에 한국나일론(현 코오롱)이 일산 2.5톤 규모의 원사공장을 지었으며, 폴리에스터는 대한방직이 공장건설 허가신청을 정부에 제출해 놓고 있었다. 아크릴은 한일합섬 등이 뛰어들어 3파전 양상을 띠고 있었다. 다만 국제적으로 한물 갔다고 생각된 아세테이트만 희망하는 회사가 없었다.

  • _ 1962. 11 수원공장 준공식에서 최종건 회장과 최종현 회장

    _ 1962. 11 수원공장 준공식에서 최종건 회장과 최종현 회장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여세를 몰아 1965년 8월 14일 ‘아세테이트 공장 건설 차관 지불보증 승인신청서에 대한 동의안’을 신청하고, 사업계획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1966년 1월 30일, 최종건 창업회장은 임원회의를 소집했다.

콤마이미지

나는 전쟁 직후 잿더미가 된 선경을 일으켜 세워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선경은 이제 겨우 단단한 반석을 마련했습니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기업을 일으켜 세울 때입니다.
올해부터 나는 선경 5개년계획을 수립해
재도약의 첫발을 내딛으려고 합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반드시 성공적으로 완수할 자신이 있습니다.

콤마이미지 <SK 창업자 담연 최종건 평전 중>

최종건 창업회장의 목표는 분명했다.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이 목적지였다. 이어 최종현 선대회장이 발표한 ‘선경 5개년 사업계획’에서도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1966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한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을 시작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작 연도인 1967년에는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건설한 후 제2직물공장과 봉제공장을 건설해 섬유종합기업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계획이었다.
임원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대부분 ‘직기 살 돈도 없는데 무슨 돈으로 원사공장을 짓겠다는 것인지’라며 의아해했다. 계획이 너무 거창하여 실감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건 창업회장은 냉담한 반응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회사를 키우려면 도전은 불가피한 것이고, 반대는 극복해야 할 숙명이었다. 그만큼 확신이 있었다. 그저그런 회사로 머무르지 않고 국내 최초로 ‘원사에서 완제품까지’ 일괄 생산라인을 갖춰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도약하는 길목에서 원사 생산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2. 선경화섬 설립 1966

수원 정자동에 원사공장 터 매입,
선경화섬 설립으로
아세테이트 원사사업의 전기를 마련하다.

  • _ 선경화섬 수원공장 입간판

    _ 선경화섬 수원공장 입간판

  • ‘선경 5개년 사업계획’ 발표 이후 1966년 4월 9일 국회로부터 ‘아세테이트 공장건설 차관 지불보증 승인신청서’ 동의안까지 통과되자 적극적으로 원사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같은 달 23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ㆍ일청구권합동위원회에서 한국에 대한 9500여만 달러의 차관 집행계획이 확정됐다.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원사 메이커를 향한 최종건 창업회장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폐허에서도 선경직물을 일궈낸 그였다. 그럴진대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사업을 전개하기에 좋은 기회 앞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선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세우기 위해 수원시 정자동 600번지 일대의 전답을 매입했다. 당시 한창 조성 중이던 울산공업단지(현 울산ㆍ미포국가산업단지)도 입지 후보로 검토했으나 훨씬 저렴한 땅값에도 불구하고 최종건 창업회장은 수원을 선택했다. 사업을 시작한 이유도 고향 이웃들과 잘살기 위함이었기에 이번에도 고향 발전을 먼저 생각했다. 정자동 주민들은 이러한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부지 매입은 순조로웠다.
  • _ 1966. 6. 15 선경화섬 설립

    _ 1966. 6. 15 선경화섬 설립

  • 이어 1966년 6월 15일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을 담당할 선경화섬주식회사(이하 선경화섬)를 설립했다. 공장 건설에 동참할 우수 인재 확보도 추진됐다. 영입 인사를 주축으로 8월에는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팀이 가동됐다. 팀장은 동생인 최종현 선대회장이 맡았다. 이와 함께 비밀리에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 준비에 들어갔다.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은 처음부터 기술제휴선으로 데이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데이진은 일찍이 영국 ICI로부터 폴리에스터 제조기술을 도입하면서 일본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몇몇의 엔지니어를 일본의 데이진으로 보내 기술연수를 받도록 했다. 1966년 9월 6일 아세테이트 공장건설 차관에 대한 정부의 지불보증이 정식으로 승인되면서 순풍에 돛단 듯 원사공장 건설은 빠르게 진행되는 듯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 _ 1967. 6. 24 선경화섬 수원공장 준공식

    _ 1967. 6. 24 선경화섬 수원공장 준공식

예상과 다르게 전개된 일본 차관 도입!
뜻밖의 암초에 절망하기보다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병행 추진으로
원사공장 불씨를 되살려내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일본행은 차관 도입선인 이토추가 추진하는 일본 정부의 수출면허 발급 업무를 지원하고, 기술제휴처인 데이진과 구체적인 기술협의를 갖기 위해서였다. 정부의 지불보증도 받았고 데이진과 기본협의도 어느 정도 이뤄진 터여서 조금은 여유로운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단위 사업을 위한 차관도입에서 최종 결정이 나기 전까지 방심은 금물이란 것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절감해야만 했다.
대일 상업차관은 한•일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한ㆍ일 국교정상화 이후 한ㆍ일 양국 기업인 사이에 체결된 차관 액수는 양국 정부가 합의한 한도액을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차관 우선순위를 지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이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포함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선경직물은 1차적으로 우선순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최종건 창업회장이 차관도입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안심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일본에 가보니 한국 정부가 통보한 차관 우선순위는 단순한 참고자료에 불과했다. 차관공여의 승인 여부는 전적으로 일본 정부의 재량이었던 것이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늦게 일본 정부의 차관승인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일본 정부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그 높은 벽을 넘기에는 일본 내에서 선경직물의 지명도가 너무도 미약했다.

1966년 11월 다시 일본으로 날아가 주일대사까지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지만, 이미 일본 대장성이 1966년 1차년도 차관 한도액에 대한 승인을 마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데이진과의 기술협의마저 교착상태에 빠졌다. 결국 차관교섭과 기술협조 모두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이보(二步) 전진을 위한 일보(一步) 후퇴’라고 생각했다. 일본 정부와의 차관교섭이 이뤄지지 않아 불안해하는 직원들에게 우선 정자동에 사놓은 공장부지의 정지작업부터 하라고 지시했다. 자신감의 표현이자 동요하지 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 _ 1966. 6. 15 선경화섬 설립

    _ 1967. 6. 24 선경화섬 원사공장 기공식

1967년 4월 정자동 공장부지의 정지작업이 시작돼 6월 24일에는 선경화섬 원사공장 기공식이 열렸다.
이와 때를 같이해 최종현 선대회장은 건설팀에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을 지시했다. 1966년 11월 최종건 창업회장이 일본에서 돌아온 후 데이진의 태도는 훨씬 호의적으로 변화돼 있었다. 최종건 창업회장도 어려운 자금사정으로 당초 반대했던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 사업의 병행 추진을 하겠다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결심은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1967년 7월 정부로부터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 인가’를 조기 승인받은 데 이어 9월에는 일본 정부의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 차관 550만 달러를 승인받았다. 결코 쉽지 않은 여건에서도 ‘하면 된다’는 불굴의 도전정신이 원사공장 건설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었다.

3. 데이진과의 인연

일류기술이 아니면 장래성이 없다!
원사사업에 대한 열정과 굳은 신념으로
데이진의 마음을 얻다.

콤마이미지

오야 사장님, 우리 선경직물에 일본인 기술자들을 파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한국의 정치가 안정되는대로 기술자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사공장 문제도 차츰 시간을 갖고 협의해 보도록 합시다.

콤마이미지 <SK 창업자 담연 최종건 평전 중>
  • _ 최종건 창업회장과 선경직물을 방문한 데이진의 오야 신죠 사장

    _ 최종건 창업회장과 선경직물을 방문한 데이진의 오야 신죠 사장

  • 1960년 9월 어느 날, 최종건 창업회장과 데이진의 오야 신죠 사장이 마주앉았다. 선경직물의 설비 수입선인 일본 종합상사 이토추의 초청을 받아 데이진, 도레이, 니치레이, 아사히가세히 등 일본 4대 원사 메이커를 방문하던 중에 이뤄진 만남이었다. 사실 당시 선경직물이 원사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회사 규모와 기술, 자금 등 어느 면에서도 원사사업을 전개하기에 충분한 요건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오야 신죠 사장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건 창업회장의 원대한 포부와 기상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 _ 일본 데이진 오야 신조 사장 방문

    _ 일본 데이진 오야 신조 사장 방문

이날의 짧지만 강렬했던 첫 만남은 이후 강고한 신뢰로 승화되며 60년간의 아름다운 동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6년여가 지난 1966년 12월, 최종현 선대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데이진에 폴리에스터 원사 제조기술 이전을 타진했다. 그러나 최고경영진의 통 큰 결단과는 별개로 실제 사업 추진은 타산적이고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데이진은 선경의 기술수준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수익성이 좋은 폴리에스터 제조기술을 한국 기업에 팔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데이진과의 교섭이 난관에 부딪치자 이토추는 도요보와의 기술협약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일본 상황도 많이 변해 폴리에스터 섬유시장은 데이진의 독점시장에서 도요보, 니치레이, 아세히가세히 등이 경쟁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현 선대회장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콤마이미지

나는 도요보의 기술로 폴리에스터 사업을 시작할 생각은 없다.
도요보 기술로는 앞으로 일류 폴리에스터 메이커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급하다고 해서 아무 기술이나 살 수는 없다.
기업의 생명은 장래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콤마이미지 <선경 40년사 중>

이것은 최종건 창업회장이 일본으로 떠나는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단단히 당부한 사항이기도 했다. 일류기술이 아니면 장래성이 없다는 신념은 철칙이었다.
이미 흥한화섬공업과 전남방직으로부터 폴리에스터 제조기술 이전 제의를 받고 있던 데이진은 기업의 장래를 내다보는 선경의 진지하고 단호한 자세에 마음을 돌렸다. 6년 전 오야 신죠 사장이 보았던 최종건 창업회장의 불타는 의지와 열정이 이번에도 전달됐던 것이다.

기술이전과 합작투자에 대한 동상이몽,
최종건 창업회장의 결단 속에 외자조달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며
데이진과 폴리에스터사업 합작투자 협약을 맺다.

한 고비를 넘고 숨 돌릴 새도 없이 더 높은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아세테이트와 마찬가지로 폴리에스터 사업 역시 기술료만 지불하고 독자적으로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데이진은 직접적인으로 기술이전보다 합작투자를 원하고 있었다. 1967년 7월 선경이 정부로부터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허가를 받아내자 데이진은 합작투자를 더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최종건 창업회장은 데이진과 합작회사를 만들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한발 물러서기로 한 것이었다. 기술 축적 없이 아세테이트 공장과 폴리에스터 공장을 단독으로 경영하는 것보다 조건에 따라서는 합작도 불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다시 건설팀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집요한 협상 끝에 총 2600만 달러를 50대50으로 투자해 일산 7톤 규모의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중합부문 제외)을 건설하는 데 의견을 접근했다. 기술부문은 데이진이, 경영은 국내 사정에 밝은 선경이 맡기로 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공장 건설에 필요한 외자조달이었다. 데이진은 과연 선경이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 두 개의 공장을 한꺼번에 건설할 수 있는 자금조달 능력이 있는지 의문을 품고 완전 합의를 미루고 있었다.

여러 가지 대안을 검토하던 최종현 선대회장은 1967년 5월 제정된 외화대출취급규정을 떠올렸다. 외화대출취급규정 2조에 따르면 ‘상공부장관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허가된 수출, 가공수출, 또는 외화표시 군납산업 시설재 및 기타 수입대금’에 해당되면 한국외환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를 보고받은 최종건 창업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특별면담을 통해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1967년 9월 생산품 전량을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상공부장관으로부터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을 위한 외화융자 추천을 받았다. 이렇듯 선경은 정부가 민간기업에 외화자금을 대부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며,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외자 700만 달러를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1968년 3월 18일 선경화섬은 데이진과 ‘폴리에스터 사업 합작투자에 관한 기본협약’을 체결했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오랜 숙원을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추까지 채워지면서 드디어 국내 최고의 원사 메이커를 향한 장도에 올라섰다.

2.
폴리에스터 원사ㆍ원면으로 수직계열화

1968년 3월과 6월 잇달아 착공한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은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위해 뿌린 씨앗이었다. 두 공장을 한꺼번에 성공적으로 건설할 수 있겠느냐는 업계의 우려 섞인 시선을 뒤로 하고 기발한 발상을 통한 내자조달 해결과 24시간 돌관공사를 통해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을 각각 1968년 12월, 1969년 2월 이뤄냈다. 단숨에 국내 1위 원사 메이커로 도약한 선경화섬은 1969년 7월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분리한 선경합섬 설립으로 성장의 디딤돌을 마련했다. 이후 1974년 7월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준공으로 석유화학산업 진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며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의 포문을 열었다.

1.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 1968

마침내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착공,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의 씨앗을 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내자조달 방법은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원사공장 병행 추진을
바라보던 회의론적 시각을 보기 좋게 불식시켰다.

  • _ 1968. 4. 28 수원 폴리에스터 공장 지질조사

    _ 1968. 4. 28 수원 폴리에스터 공장 지질조사

  •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건설은 1968년 3월 25일 시작됐다. 뒤이어 3개월이 채 못된 6월 10일에는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착공했다. 직물공장으로 시작해 훗날 정유사업까지 이어지는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첫 순간이었다.
    선경의 믿기지 않는 행보에 국내 섬유업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착공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더니 폴리에스터 원사공장까지 착공하자 놀라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과연 한꺼번에 두 공사를 순조롭게 끝내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외자 700만 달러 조달에는 성공했으나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 공장 건설에 필요한 내자 32억 원(각각 14억 원, 18억 원)을 예정 공사 기간인 15개월 내에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면 매월 2억 원 이상을 동원해야 하는데, 선경직물의 최고 히트상품인 깔깔이 생산, 판매로 호황을 누릴 때임에도 불구하고 월 매출액은 2억 원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은행 돈을 끌어다 쓰겠지만 은행 돈이라고 무한정 갖다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하나만 건설하는 데 필요한 14억 원이라면 어떻게 꾸려갈 수도 있지만,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에 필요한 18억 원까지 함께 조달해야 하니 업계의 회의적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 _ 1968년 수원 아세테이트 공장 건설현장

    _ 1968년 수원 아세테이트 공장 건설 현장

그럼에도 최종현 선대회장은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사업의 병행 추진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있게 ‘자금 조달은 나에게 맡기라’고 공언했다. 선경의 구성원들은 그를 믿으면서도 그 엄청난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최종현 선대회장이 국내에서 동원해야 할 내자를 해결한다며 일본으로 떠나는 것이 아닌가. 데이진으로부터 300만 달러어치 폴리에스터 원사를 3년 연불조건으로 외상으로 들여오면서 그 지불보증을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차관 공여자인 이토추에게 맡기는 기발한 방법을 성사시켰는데, 이는 내자조달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과연 그 형에 그 동생이었다.

폴리에스터 원사 300만 달러어치는 약 1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당시 국내 폴리에스터 원사 가격이 파운드당 1500 ~ 1800원이었으니 당장 되팔아도 18억 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선경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원사로 깔깔이, 크레퐁, 앙고라 같은 히트상품을 생산, 국내 시판은 물론 수출까지 하여 원사공장 건설에 필요한 내자를 충당해냈다.

내자조달까지 성공적으로 이뤄지자 선경은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현장에서는 돌관작업으로 공사에 임해 예정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며 원사메이커를 향한 꿈에 한발 더 다가섰다.

2.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 1969

밤낮없이 울려퍼지는 건설장비 소리, 하루라도 빨리 공장을 준공하기 위한 열정,
아세테이트ㆍ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준공을 9개월 앞당기다.
폴리에스터 섬유시대를 개막하며 국내 1위 원사 메이커로 올라선 선경화섬!

수원 정자동의 원사공장 부지에서는 밤낮없이 건설장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공사가 시작될 무렵에는 5월 일본 데이진의 공장으로 기술연수를 떠났던 공장운영요원 40여 명이 45일간의 교육을 마치고 돌아왔다. 어느새 반입된 각종 설비들도 공장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 _  수원 아세테이트공장 건설 공사

    _ 수원 아세테이트공장 건설 공사

1968년 8월부터는 아세테이트 원사공장 설비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어 10월에는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에도 설비가 들어섰다. 예정보다 훨씬 빠른 진척률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과 함께 고도성장하고 있던 화학섬유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원사공장을 세우고자 노력한 결과였다. 당시 섬유산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면방 및 모방산업도 혼방용 폴리에스터 원료를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국제경쟁력 제고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기에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 국내 최초의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이 준공된 것은 예정 공사 기간을 9개월이나 앞당긴 1968년 12월 25일이었다. 폴리에스터 원사공장도 예정 공사 기간 보다 9개월 앞당겨 1969년 2월 10일 준공됐다. 마침내 최종건 창업회장의 오랜 꿈이 현실화돼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끝없는 열정과 불타는 투지로 이뤄낸 값진 결과였다. 선경화섬의 ‘정자동 시대’ 개막은 우리나라 섬유산업 역사의 이정표이기도 했다. 수원공장의 준공으로 국내 원사 생산능력은 하루 35.5톤 규모에서 48톤으로 증대됐다. 생산 원사의 종류도 나일론과 비스코스 2종에서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까지 4종으로 다양화됐다. 무엇보다 폴리에스터 섬유시대의 도래로 한국 섬유산업은 1970~1980년대 ‘한강의 기적’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 _ 1969. 2. 7 선경합섬 첫 방사

    _ 1969. 2. 7 선경합섬 첫 방사

선경화섬은 단숨에 국내 1위 원사 메이커로 도약했다. 국내 최초로 아세테이트 인견사와 폴리에스터 원사를 동시에 생산하는 것은 물론 아세테이트 인견사 하루 생산능력 5.5톤, 폴리에스터 원사 하루 생산능력 7톤으로 국내 원사 생산의 26%를 담당하게 됐다. 바야흐로 작은 직물업체의 꿈이 커지고 커져 마침내 원사공장을 완공하면서 국내 유일의 섬유종합기업으로서 한국 섬유산업을 견인하며 성장가도를 달려 나갔다.

3. 선경합섬 설립 1969

선경이 생산한 원사, 스카이론의 탄생!
수준 높은 품질과 전량 수출조건 해제로
성장의 디딤돌을 마련하다.

선경화섬이 데이진과 ‘폴리에스터 사업 합작투자에 관한 기본협약’을 체결한 것은 1968년 3월 18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선경화섬이 추진 중이던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허가는 합작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경화섬과 데이진은 같은 해 4월 30일 ‘신규 합작회사를 설립할 때까지 상호 협력할 사항과 조건’에 합의하고 6월에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을 착공했었다.

이후 양사는 1968년 10월 25일 합작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듬해 1969년 2월 11일 합작계약에 대한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일산 7톤 규모의 생산시설을 중합설비와 함께 21톤 규모로 증설하기로 하고 제1차 증설계획에 착수했다.

  • _ 1969. 2. 10 선경화섬 수원 폴리에스터 공장 완공 직후

    _ 1969. 2. 10 선경화섬 수원 폴리에스터 공장 완공 직후

  • 이에 앞서 1968년 가을,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의 준공을 앞두고 원사에 사용할 상표를 사내 공모했다. 많은 사원들의 응모작 중 당선작은 ‘선경이 생산한 원사’라는 의미의 ‘스카이론(SKYRON)’이었다. S와 K는 ‘선’과 ‘경’의 로마자 표기의 머리글자이고, Y는 생산(Yield)을, RON은 원사 이름에 통상 붙여지는 Lon을 특색 있게 변형한 것이었다. 또한 SKY는 하늘로 웅비하는 선경의 이상을 상징하면서 이후 지금까지도 선경을 상징하는 네이밍으로 사랑받고있다. 1969년 2월 수원공장 준공 이후 스카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한 폴리에스터 원사는 품질 면에서 국내외의 호평을 받았다. 일본기술원 섬유공업소 분석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기술을 제공한 데이진의 제품보다 우수하다는 업계의 평가였다. 이러한 결과는 수원공장 엔지니어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으로 모든 한계를 뛰어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폴리에스터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몰랐고, 일본어도 잘하지 못했지만 매일 언어를 배우며 엄청난 강도로 데이진에서 제공하는 이론과 제조기술 노하우를 완전히 배워 나갔다. 결국 우리나라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전 구성원이 일치단결해 성취욕을 발휘함으로써 데이진에서 전수해준 기술수준을 더욱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던 국내 폴리에스터 원사 수요량도 선경화섬의 폴리에스터 사업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국내 폴리에스터 원사 수요량이 급증하면서 1967년 1368톤에 불과하던 폴리에스터 원사 수입량은 1968년 2928톤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고, 1969년에는 수요량이 4765톤에 이를 것으로 예상돼 대책이 시급했다. 그러나 선경화섬은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을 위한 외화자금 융자조건으로 국내 시판이 금지돼 있어 연간 2555톤에 달하는 원사 생산능력에도 불구하고 국내 원사 수급 해소에 기여하고 있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선경화섬에 대한 전량 수출조건을 해제했으며, 선경화섬은 생산한 원사 전량을 국내에 시판할 수 있게 돼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폴리에스터 원사 전문기업
선경합섬의 새로운 여정, 불황을 헤치며
일산 7톤에서 52.5톤으로의 성공적 증설!

  • 선경화섬의 스카이론은 우수한 품질로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선경직물이 이미 깔깔이, 앙고라, 크레퐁 등 폴리에스터 직물로 개척해 놓은 제직기술이 있어 다양한 수요처를 확보하며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이 같은 사세의 성장에 발맞춰 1969년 7월 1일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선경화섬에서 분리해 데이진과 합작법인 선경합섬을 설립했다. 1966년 ‘선경 5개년 사업계획’ 발표로 공식화된 폴리에스터 원사사업 추진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1970년 12월에는 일산 21톤 규모의 중합설비와 함께 방사설비를 일산 7톤에서 21톤으로 증설하는 제1차 증설공사를 완공해 시험가동에 들어갔다.
  • _ 1969. 7. 1 폴리에스터공장이 선경화섬에서 분리되며 선경합섬 설립

    _ 1969. 7. 1 폴리에스터공장이 선경화섬에서 분리되며 선경합섬 설립

그러나 폴리에스터 원사 전문기업으로 출범한 선경합섬의 여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국내 폴리에스터 시장은 어느새 공급과잉 양상을 빚고 있었다. 불과 2년 사이에 일산 18톤 규모의 한국포리에스텔이 준공되고 선경합섬 또한 생산규모가 확대되면서 1971년 국내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량은 전년 대비 151%나 증가했다.

불황 타개책이 필요했다. 내수시장이 작은 우리나라로서는 역시 수출만이 살 길이었다. 선경합섬은 그중에서도 대미 수출을 통한 활로찾기에 집중했다. 물론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화학섬유의 본거지인 미국에 폴리에스터 원사를 수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경합섬은 폴리에스터 원사인 스카이론의 품질과 가격경쟁력에 자신 있었다.

  • _ 1971년 아세테이트 토우 첫 출하 모습

    _ 1971년 아세테이트 토우 첫 출하 모습

1971년 5월 폴리에스터 원사 1500톤 수출을 시작으로 그해에만 모두 1807만 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했다. 선경합섬이 폴리에스터 원사 하나만으로 1971년도 선경그룹 총 수출액 2898만 달러의 60% 이상을 담당한 것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성과이자, 당시 폴리에스터 원사의 사업적 가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1972년 경기가 호전되자 선경합섬은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제2차 증설계획을 본격화했다. 일산규모 21톤 시설로는 날로 급증하는 폴리에스터 원사의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 일산 10.5톤을 증설, 일산 총 31.5톤 규모를 갖추기로 했다. 사실 제2차 증설계획은 1970년 2월 확정한 것이었는데, 경기불황으로 잠시 미뤘던 것을 다시 재개한 것이었다.

  • _ 1970년대 인도네시아 수출을 위해 폴리에스터 원면을 선적하는 모습

    _ 1970년대 인도네시아 수출을 위해 폴리에스터 원면을 선적하는 모습

1972년 착공한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제2차 증설공사는 1973년 5월 완료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같은 해 9월 일산 21톤 증설공사에 착수해 1974년 5월 준공했다. 이로써 선경합섬은 일산 52.5톤 규모의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능력을 구축하며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원사 메이커로서 위상을 굳건히 했다.

4.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준공 1974

선경합섬의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준공!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의 포문을 열다.

사실 최종건 창업회장의 꿈은 이미 오래전부터 ‘석유에서 섬유까지’, 즉 업스트림에서 다운스트림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갖추는 것이었다.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건설해 국내 섬유산업의 전기를 마련하고 나자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에 대한 구상은 어느덧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72년 일본 데이진으로부터 선경그룹과 합작으로 정유회사를 설립하고 싶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데이진의 구애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오야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에 석유정제공장을 지을 것과 자매회사인 선경 최종건 회장과 함께하고 싶다’는 서한을 직접 보내기도 했다.

1973년 초 선경그룹은 일본 데이진, 이토추가 공동 투자하는 형식으로 일일생산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설립하기로 합의했으며, 폴리에스터 원료인 DMT(Dimethyl Terephthalate) 공장 건설계획까지 수립했다. 이후 울산시 황성동 해안과 온산 일대 330만 5785㎡(100만 평) 규모의 부지를 정부로부터 석유사업단지 개발지역으로 내인가받았다.

  • _ 1973. 5. 20 선경합섬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개토식

    _ 1973. 5. 20 선경합섬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개토식

첫 포문은 1973년 5월 20일 거행된 선경합섬의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개토식으로 열었다 . 선경합섬은 석유화학계열공장 건설계획 일환으로 울산시 황성동 해안 600번지 일대의 99만 1735㎡(30만 평) 부지에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건설을 착수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의 발발로 그룹의 석유화학공업진출계획이 위기를 맞으면서 선경합섬의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건설도 난관에 봉착했다. 다행히 공장 건설이 중단되지는 않았으나 공사 자체에 어려움이 많았다.

공장 부지로 확보한 황성동 해안 일대가 바다에 면한 갯벌이어서 건설 중장비의 현장 진입부터가 난관의 연속이었다. 비가 조금만 와도 배수가 되지 않아 공사 현장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했다. 물도 귀해 식수를 제외한 생활용수는 빗물을 받아서 써야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예정 공사 기간 내에 공사를 마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며칠씩 철야작업을 계속했고, 공사 막바지에는 여름 장마철 전에 건설을 완료하기 위해 24시간 밤낮없이 공사를 진행하는 돌관작업을 강행했다.

노력은 결실을 거둬 예정 공사 기간에 크게 차질 없이 1974년 7월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을 준공해냈다. 폴리에스터 원면 100톤 규모로 단일 섬유생산시설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무엇보다 그룹의 DMT공장과 정유공장 건설 등 일련의 석유화학계열공장 건설계획이 유보된 상황에서 선경합섬의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준공은 선경그룹 석유화학산업 진출의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수원 폴리에스터 원사공장을 통해 섬유종합기업의 반석을 만들고,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준공으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토대를 닦은 도전과 열정의 DNA를 기반으로 오늘날 SK케미칼로 이어진 것이다.

  • _ 1974. 7 선경합섬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준공

    _ 1974. 7 선경합섬 울산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준공

3.
국내 유일 섬유종합기업으로 발돋움

1973년 11월 15일 재계의 거목 최종건 창업회장이 타계했다. 그러나 선경화섬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사업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76년 선제적인 선경합섬 기업공개는 그룹 성장의 발판으로 작용했다. 합작회사이기 때문에 기업공개를 할 의무는 없었으나 기업 발전이라는 장기적 안목에서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 자금조달과 함께 국민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제고했다. 1978년 국내 최초 PET 수지 생산은 폴리에스터 원사 중심의 섬유사업에서 폴리에스터 수지 중심의 화학소재사업으로 전환하는 기점이었다. 이듬해 1979년에는 선경합섬연구소 설립을 통해 기술개발의 전기를 마련하며 향후 정밀화학사업을 확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1. 최종건 창업회장 타계 1973

청천벽력의 폐암 진단!
마지막까지 불태운 수직계열화의 꿈
평동 직물공장, 정자동 원사공장, 울산 원면공장을
둘러보며 의연하게 삶을 정리하다.

  • 1973년은 최종건 창업회장이 선경직물을 창업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자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의 기치를 높이 올린 기념비적인 해였다. 선경화섬과 선경합섬을 설립해 폴리에스터 원사ㆍ원면으로의 수직계열화에 성공하고 DMT공장과 정유사업을 필생의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석유화학산업 진출에는 국내 유일의 섬유종합기업으로 발돋움한 선경그룹의 명운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듯, 1973년 3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최종건 창업회장은 망연자실했다. 주치의로부터 폐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결과를 받아든 것이었다. 최종현 선대회장 등 주위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 _ 1970년대 초 최종건 회장의 근무 모습

    _ 1970년대 초 집무실에서 최종건 회장

4월 초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정확한 진단을 받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치료를 거부하고 귀국을 서둘렀다. 그에게는 자신의 병보다 더 급한 것이 석유사업이었다. 마지막으로 선경유화 설립과 DMT공장 건설계획을 지휘하고 5월에 다시 코발트 광선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20일도 안 돼 다시 귀국을 결정했다. 강력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암세포가 이미 체내에 퍼져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행여 사업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우려하여 입원을 거부하고 워커힐 별장에서 투병을 계속했다. 직접 참석하지 못한 1973년 7월 1일 선경화섬 창립 7주년 및 선경합섬 창립 4주년 기념사를 마지막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던 어느 날 죽마고우의 갑작스러운 부음 소식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주치의는 강력히 입원을 권유했다. 9월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그를 보기 위해 각계각층의 문병객들이 줄을 이었다.

  • _ 김종필 총리의 문상

    _ 1973. 11. 유가족을 위로하는 김종필 총리

최종건 창업회장은 언제나 잔정이 넘쳐 직원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화가 나면 곧장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내 화를 풀고 달래주었으며, 직원들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아는 경영인이었다. ‘수고한다’라는 말에는 인색했지만 베푸는 데 아끼지 않았으며 때로는 용돈도 듬뿍 쥐어 주었다. 병실에서 최종건 창업회장을 만나고 나온 회사 간부들의 눈은 충혈될 수밖에 없었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의연하게 자신의 남은 생을 정리하고자 했다. 거동이 더 어렵게 되기 전에 자신의 피땀이 밴 공장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수원 정자동의 원사공장이었다. 논을 메우고 밭을 다져서 공장을 세운 지도 벌써 5년, 원사공장이 있었기에 석유화학산업 진출의 꿈도 첫발을 뗄 수 있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잿더미를 헤치며 맨손으로 일으켜 세운 평동 직물공장에서는 고락을 함께한 창업동료들과 시집 간 여공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다음에는 경부고속도를 달려 울산으로 향했다. 광활한 황성벌에서는 일산 100톤 규모의 폴리에스터 원면공장 건설을 위한 망치소리가 한창이었다. 이미 부지 정지작업은 끝나고 토목공사도 80% 이상 진척돼 본공장 건물 일부가 완공된 가운데 제품창고를 짓는 중이었다. 생전에 준공을 보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그것이 어딘가. 정유사업의 꿈도 원면공장 건설과 함께 다시 본격화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나라 산업의 초석을 세운 재계의 큰 별,
향년 48세의 일기로 영면에 들다.
못다 이룬 꿈과 희망, SK그룹 웅비의 날개로 영원한 생명력을 얻다.

  • _ 1973. 11 최종건 회장 영결식에 모인 조문객들

    _ 1973. 11 최종건 회장 영결식에 모인 조문객들

  • _ 1973. 11 최종건 회장 영정

    _ 1973. 11 최종건 회장 영정

  • 1973년 11월 15일 밤 9시 55분 최종건 창업회장은 가족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향년 48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지칠줄 모르는 열정, 단호한 결단력, 강인한 추진력 그리고 탁월한 통솔력으로 선경을 일으켜 우리나라 산업의 초석을 세운 재계의 큰 별이 스러지자 사회 각계각층의 추모가 이어졌다. 장례는 5일장으로 엄수됐으며, 1973년 11월 19일 오전 10시 수원 선경합섬에서 거행된 영결식에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운집해 1000여 명의 선경인들과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영결식이 끝난 후 최종건 창업회장의 유해가 실린 운구차는 선경합섬을 떠나 평동 직물공장과 고인의 생가에 들른 후 장지인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상리의 선영으로 향했다. 그리고 1973년 11월 19일 오후 3시 선친의 묘소 아래 마련된 유택에 안치됐다. 아들 윤원, 신원, 창원과 딸 정원, 혜원, 지원, 예정 등 7남매가 어머니 노순애 여사와 함께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 곁을 떠나지만, 뒤에 오는 많은 사람은 그 그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최종건 창업회장에게 기업은 그런 의미였다. 비록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암울한 시절에서도 희망의 실낱을 엮어내 선경을 키워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의 못다 이룬 꿈은 최종현 선대회장을 중심으로 면면이 계승돼 SK그룹 웅비의 날개로 승화됐다.

  • _ 1975. 11. 14 최종건 회장 동상 제막식

    _ 1975. 11. 14 최종건 회장 동상 제막식

2. 선경합섬 기업공개 1976

‘기업이 커질수록 사회의 공기가 되어야 한다.’
합작사 데이진을 설득해 국민의 기업으로 거듭나다.
선경합섬과 선경화섬의 합병은 새 시대를 준비하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선경합섬이 1969년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를 생산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약 10년이 지나는 사이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폴리에스터 섬유 생산국 대열에 진입했다. 선경합섬도 국제적 대기업으로 성장했는데, 일본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에서 선정하는 산업별 세계 50대 기업 가운데 1975년 생산량 기준 합섬 부문에서 32위를 차지했다. 특히 해외 수출이 크게 늘면서 1976년에 수출 9000만 달러를 포함해 625억 원의 매출액을 올려 1975년 436억 원보다 무려 43%의 증가세를 시현했다.

  • _ 1976. 6 선경합섬 기업공개

    _ 1976. 6 선경합섬 기업공개



선경합섬은 성장하는 사세에 발맞춰 기업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위해 1976년 6월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선경그룹 계열사의 기업공개로는 두 번째 사례였다. 사실 선경합섬은 일본 데이진과의 합작회사였기 때문에 기업공개촉진법상 굳이 기업공개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더욱이 데이진은 기업공개에 따르는 지분율 감소로 인해 경영참여권이 약화될까 우려하고 있어 동의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 1월 기업공개촉진법의 시행으로 비공개기업보다는 공개기업이 기업경영상 유리할 뿐만 아니라 기업발전을 위한 장기적 안목에서도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데이진을 설득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기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회의 공기가 되게 마련이고, 사회의 공기가 되면 어느 극소수의 사람만의 소유로만 그칠 수 없는 일이다(사보 선경 1975년 7월 호 중)”라는 최종현 선대회장의 소신이 크게 작용했다. 결국 데이진이 동의함에 따라 선경합섬은 선제적인 기업공개를 통해 그룹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1976년 2월 25일 재무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선경합섬과 선경화섬의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선경합섬이 선경화섬을 흡수 합병했다. 선경합섬은 선경화섬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승계했으며, 선경화섬의 주식 192만 31주(19억 2003만 1000원)를 무상으로 소각ㆍ감자함으로써 선경화섬을 해산했다. 같은 날 선경합섬 임시주주총회에서는 주식 1주 금액 1000원을 500원으로 분할하기로 하는 한편 자본금을 100억 원으로 증자하되 그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660만 주(33억 원)를 액면가 500원에 구주매출 방식으로 공개할 것을 결의했다. 또 본사와 수원 및 울산공장 사원 453명으로 구성된 ‘선경합섬 우리사주조합’을 발족시키고 총 매출주식의 10%에 해당하는 66만 주를 배정했다.

  • 1976년 6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일반인에게 공개된 선경합섬 주식은 7.5 대 1의 청약률을 기록했다. 선경합섬에서 매각한 주식 물량이 다른 기업에 비해 훨씬 방대했음에도 이처럼 높은 청약률을 나타낸 것은 우리나라 수출을 견인하며 600억 원대의 매출액을 자랑하던 선경합섬에 대한 일반 국민의 높은 신뢰를 방증하고 있었다. 기업공개 후 선경합섬의 지분율은 선경합섬 53%, 데이진 47%에서 선경합섬 33.5%, 데이진 33.5%, 일반공개주식 33%로 변동됐다. 데이진의 소유지분은 종전 47%에서 33.5%로 낮아졌는데, 기업공개를 통해 외국합작회사의 주식소유지분율이 떨어진 것은 국내에서는 선경합섬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선경합섬과 데이진의 상호 신뢰가 굳건했음을 의미했다.
  • _ 1976년 기업공개 관련 회의

    _ 1976년 기업공개 관련 회의

그러나 주식소유지분율이 3분의 1 감소하자 사실상 데이진의 경영참여 의미는 퇴색했다. 이에 따라 1978년 8월 1일 데이진이 선경합섬에 대한 경영참여를 종식하고 주주로서만 남게 되면서 선경합섬은 선경의 경영진에 의한 단독경영 체제로 바뀌었다. 다만 그동안에도 경영은 선경에서 맡고 기술 부문을 데이진에서 맡아 왔었기 때문에 경영상 변화는 크게 없었다.

3. 국내 최초 PET 수지 생산 1978

독자적인 PTA로의 원료 전환, 기술 혁신과 생산성 증대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선경합섬은 끊임없는 기술혁신으로 경쟁력을 높여갔다. 특히 1976년 초부터 독자적인 설비개체계획을 수립, 폴리에스터 섬유의 주원료를 DMT에서 PTA(Purified Terephthalic Acid)로 전환을 추진했다. 당시 선진국의 화섬업계에서는 이미 폴리에스터 섬유의 주원료인 DMT를 품질이 우수한 고순도 PTA로 전환해 원가절감과 공정단축에 인한 수익률 향상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선경합섬도 국제적 추세에 부응하는 한편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PTA로의 원료 전환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DMT를 PTA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생산설비의 개선•교체가 필요했으며, 이는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기술을 요구했다. 다각도의 검토 끝에 선경합섬은 단계적 전환을 통해 자금과 기술의 한계를 보완하기로 했다.

1977년 2월부터 울산공장에서 생산라인별로 PTA 시스템 개조작업이 이뤄졌다. 이후 반 년 만에 울산공장의 모든 생산라인을 PTA 시스템으로 개조 완료했다. 수원공장에서는 같은 해 5월부터 폴리에스터 원사 전 생산공정을 축소시킨 파일럿 플랜트를 설치, 운용해 12월 모든 생산공정을 PTA로 전환했다.
1년 6개월 만에 독자적으로 PTA로의 원료 전환에 성공하자 원가절감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동안 연간 사용량 5000톤에 달하던 DMT를 PTA로 대체함으로써 연간 10억 원 이상의 원가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한 배치(Batch Process)당 6시간 걸리던 생산공정을 4시간 이하로 단축해 기존 시설을 늘리지 않고도 30% 이상 증산할 수 있었다.

화섬업계에 짙게 드리운 불황의 그늘,
기존 사업의 위기를 신사업의 기회로 삼다.
국내 최초로 PET 수지를 생산해냄으로써
폴리에스터 원사 중심이던 사업의 물줄기를 화학소재사업으로 돌려 놓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화섬업계를 둘러싼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경공업제품 수출에 편중돼 있던 국내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화섬업계의 성장세는 꺾이고 있었다. 수입자유화 정책의 추진으로 수입마저 크게 증가해 불황의 그늘은 더욱 짙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생산물량의 15%만이 내수용으로 공급되고 있을 뿐 나머지 전량을 수출하고 있었던 만큼 폴리에스터를 원료로 하는 국제 섬유시장 여건이 조금만 변동해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불황에서 벗어나면서도 앞으로의 성장까지 담보할 수 있는 혜안이 필요했다. 선경합섬은 비섬유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청량음료ㆍ간장 등 식품업계가 유리병 확보난으로 정상가동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1978년 초부터 PET(Poly Ethylene Terephthalate) 병(Bottle)용 폴리에스터 수지 개발에 나섰다.

  • 한발 앞선 이러한 도전은 선경합섬이 폴리에스터 원사 중심의 섬유사업에서 폴리에스터 수지 중심의 화학소재사업으로 구조를 전환하는 시작점이었다. PET병은 미국 듀폰이 1975년에 처음 개발한 신소재로서 미국 FDA가 공인한 새로운 무독성 식품용기였다. 우리나라에서 개발하기 전 이미 미국 내에서는 코카콜라ㆍ펩시콜라 등 청량음료 용기 원료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며,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폴리에스터 수지는 이 PET병의 원료로서 유리병을 대체할 수 있어 크게 각광받고 있었다. 선경합섬은 약 2억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해 1978년 10월 국내 최초로 간장ㆍ식용유 등의 용기에 사용되는 상압용(常壓用) 폴리에스터 수지를 개발했다. 1979년 3월에는 탄산음료용 용기를 만드는 내압용기용(耐壓容器用) 고점도 폴리에스터 수지를 개발하고 제3회 합성수지 전람회에 2리터 용량의 콜라병을 출품했다. 선경합섬의 제품은 유리 용기에 비해 13분의 1 정도의 무게로, 3m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깨지는 경우라도 파편이 발생하지 않아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 7월 엄격하기로 정평이 난 미국 FDA로부터 2년여 만에 인체에 무해하다는 판정을 받음으로써 국제적으로 품질을 공인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 _ Bottle용 PET 수지 개발

    _ Bottle용 PET 수지 개발

이어 세계 최대 탄산음료회사인 코카콜라 본사로부터도 탄산음료 용기로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와 함께 코카콜라 병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적합판정을 받았다. FDA 못지 않게 코카콜라 본사의 품질검사 역시 철저했다. PET병에 담은 콜라가 6개월 후에 변질했는가를 확인하는데 인체에 대한 유ㆍ무해 판정은 물론이고 맛의 변질 여부, 탄소의 소실 여부 등을 까다롭게 검사했다. 그 결과 코카콜라 본사가 규정하고 있던 기준치보다 훨씬 양호하다는 판정을 받음으로써 선경합섬은 우리의 기술력을 세계에 드높였다.

4. 선경합섬연구소 설립 1979

신제품 개발과 기술 혁신의 심장부, 선경합섬연구소.
시대를 앞서가는 연구개발로
고부가가치 섬유와 정밀화학ㆍ신소재 분야의 초석을 만들다.

197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폴리에스터 섬유 생산규모는 일산 470톤에 이르러 당당히 세계시장의 리더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도한 설비경쟁은 제살 깎기의 공급과잉을 초래했고, 그에 비해 가공기술과 신제품 개발은 부진해 국내 화섬업계의 국제경쟁력은 서서히 빛을 잃게 됐다. 국제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신제품 개발과 기술혁신이 요구되고 있었다.

선경합섬은 섬유사업의 기반을 강화하고 정밀화학 및 신소재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한다는 중장기 비전을 수립하며 1979년 5월 1일 선경합섬연구소를 설립했다. 폴리에스터 폴리머(Polymer)의 개질연구와 고부가가치의 새로운 섬유제품 개발, 각종 새로운 플라스틱의 합성연구 등 신제품 프로젝트의 연구개발을 위해 1978년 5월 수원공장 기술부를 통합 발족한 연구개발부를 독립기구로 확대 개편한 것이었다.

  • _ 선경합섬연구소 현판식

    _ 선경합섬연구소 현판식
  • 선경합섬은 1975년 4월 1일 수원공장 기술과와 울산공장 기술과를 통합해 기술개발부를 발족했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기술인력과 실험시설을 수원공장과 울산공장으로 이원화한다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이후 1976년 12월 1일 기술관리부로 확대 개편해 산하에 개발과ㆍ기술과ㆍ관리과를 두면서 수원공장과 울산공장에 기술부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다시 1978년 5월 수원공장 기술부를 통합해 연구개발부로 개편, 연구활동을 이어오고 있던 것을 선경합섬연구소로 확대함으로써 고분자화학ㆍ정밀화학ㆍ섬유 분야 기술개발의 전기를 마련했다. 연구소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본사에도 연구개발부를 두었다. 이로써 선경합섬의 연구조직은 선경합섬연구소와 연구개발부 체제를 확립했다. 선경합섬연구소는 폴리머 개질, 섬유 개질, 시험ㆍ관리 등을 담당하고, 본사의 연구개발부는 신규 프로젝트의 기술적 검토, 제사ㆍ제면 공정기술 및 신소재 개발, 후가공, 기술정보 조사 등을 담당했다.
  • _ 1983. 11. 4 선경합섬연구소 신축 기공식

    _ 1983. 11. 4 선경합섬연구소 신축 기공식

선경합섬연구소는 섬유 부문의 신소재 개발과 비섬유 부문인 고분자ㆍ정밀 화학의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 향후 유화 및 정밀화학 사업 진입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를 위해 각종 첨단 연구장비도 확충했다. 중합•방사 및 가연기 등 합성섬유 연구개발에 필요한 파일럿 설비를 완비했으며, 분광 광도계(Spectrophotometer)•열응력시험기(Thermal Stress Tester) 등 최신 분석기를 비롯한 100여 종의 각종 분석설비를 확보했다. 또 연구원 확충은 물론 매년 인력을 선발해 미국의 MIT공과대학, 일본의 도쿄공대, 한국과학기술원 등에 장기간 파견교육을 받도록 함으로써 연구원들의 역량 향상을 통한 독자기술 개발을 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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