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한국일보의 [미래를 여는 사람들]이란 칼럼에 게재된 바이오벤처 '인투젠' 김대기 박사편입니다.----------------------------------------------------------- 지금은 신약 개발의 대명사가 된 김대기 박사는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 뻔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아버님이 육군 상사 출신이신 데다 당시 육사는 대단했거든요. 또한 학비도 들지 않으니까 당시 식당을 하던 부모님께도 부담을주지 않아도 되고요.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육사에 들어가려면 다리가 곧아야 된다고 하는데 저는 양 다리 사이가 다소 벌어진 체형입니다. 그래서 다리를 붙이기 위해 다리를 끈으로 묶고 한동안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안되더라구요. 포기했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양 다리가붙지 않아도 육사를 진학하는데 지장이 없더군요.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전화위복이 된 것 같습니다.” 낙심한 김 박사는 막연히 동경하던 과학자로 눈길을 돌렸다. 특히 많은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졸업 후 비교적 쉽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약학에 호감이 갔다. 1973년 서울대 약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의 입학성적은 80명 정원에 78등. 김 박사는 “입학성적은 꼴찌나 다름없지만 지금은 우리 학번 중에 나만큼 유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구자가 유명하다는 것은 좋은 논문이 많다는 의미”라며 “지금까지 항암제와 항바이러스, 발기부전 등에 대한 60편 가량의 논문을 냈고, 이 덕에 기업에 가서도, 학회에 가서도 내가 이야기하면 통한다”고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사실 그는 신약개발의 세계적인 학술 권위지에 국내 연구자로서는 최초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또 하나의 갈림길은 약국 경영의 유혹이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 학비조달 차원에서 차린 약국이 너무나 잘 됐기 때문이다. “학교와 가까운 관악구 봉천동에 처음 약국을 개업한뒤 방배동으로 이전했는데 정말 잘 됐습니다. 임신 안 되는 부인 2명이 저의 처방으로 임신했다, 어린이 약을 잘지워준다는 입소문까지 나서 약국은 그야말로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한 달에 300만원을 쥘 수 있었습니다. 1979년 당시만 해도 약국 주변의 방배동 지역 아파트가 3,000만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에 집 한 채를 장만할 수 있었던거죠.” 돈 되는 약국 버리고 유학길 나서그러나 김 박사는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개업 약사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약사로서 더 크게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미국행에 나섰다. 뉴욕 주립대(버발로)에서의 초기 유학생활은 악전고투였다. 언어의 장벽에다 교수와의 갈등까지 겪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원래 독종’이라는 말을 되뇌이며 철저하게 노력했다. 세미나를 위해 논문을 모조리 암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성실성으로 그는 4년만에 항암제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수들의 추천으로 미국 거대 제약회사인 ICN사가 신약개발을 위해 설립한 핵산연구소에 입사했다. 여기서도 그는 열심이었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1월1일까지 회사에 나와 실험을 하던 중 폭발사고를 당해 한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다. 1년 정도의 미국 직장생활을 접고 87년 귀국과 함께 국책연구소인 화학연구소로 들어갔다. 그는 국책연구소에 대해 할말이 많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책연구소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정책이 오락가락하고, 분위기는 갈수록 관료화 경직화했습니다. 연구비 확보도 어렵구요. 특히 잘 하려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그런 분위기는 좋은 인재들을 밖으로 내몰고 연구소의 경쟁력을 떨어뜨렸습니다. 잘 보세요. 지금까지 과학기술 관련 국책연구소에 엄청난 돈을 들였지만 민간연구소에 비해 성과가 떨어집니다. 이제 국책연구소는 제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선진국을 보세요. 국책연구소는 민간이 하기 어려운 기초 연구를 해서 발전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89년 SK케미칼 책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항암제 연구에 매달렸다. “많은 약중에 항암제에 승부를 건 데에는 저와 회사의 생각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선 SK란 재벌이 하는 회사인만큼 사회적 기여도가 있는 약이어야 하고 약의 라이프 사이클도 길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항암제가 적격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항암제는 특성상 한번 나오면 수 십년 사용되니까요. 또한 회사 입장에선 초대 회장인 최종건 회장이 폐암(동생인 최종현 회장도 암으로 사망)으로 타계한 만큼 항암제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습니다. 회장 때문에 암 연구에 나섰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최고경영자의 건강이 회사경영과 직결되는 점을 고려하면 회사가 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의 입장에선 항암제가 주전공이니 잘 됐죠.” 그는 이후 선플라란 항암제를 개발하기까지 9년 동안 밥먹듯이 새벽 2~3시에 퇴근하는 강행군을 했다.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입에서도 화학약품 냄새가 날 정도 였다. “회사에서 많이 도와줘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안타까웠던 일이 있습니다. 연구팀이 만들어낸 120가지 화합물중에 숙고 끝에 선택한 화학물 SKI2034R이 실패했을 때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이 물질은 선플라보다 휠씬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개에게 실험을 해보니까 전부 탈수증상으로 죽어버렸습니다. 선플라는 대안이었습니다. SKI2053R를 선택해 마침내 성공을 했지만 지금도 처음 선택한 물질을 계속 연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제3세대 항암제 '플라주' 탄생99년 7월 김 박사가 탄생시킨 플라주는 한국 최초의 신약이다. 그는 ‘100년 한국 제약사의 기념비적 사건’이란 격찬을 받았다. 중소기업들이 난립한 국내 제약산업여건 상 신약개발은 일종의 ‘꿈’이다. 일반적으로 신약이 탄생하려면 10년의 기간과 수천억원의 비용이 소요되고, 약 설계사, 유기화학자, 약리학자, 수의학자, 임상학자 등이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더라도 인간에게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약물로 상품화하는 것은 성공확률이 수천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단 성공하면 굉장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엄청난 위험부담에도 불구, 선진국들이 경쟁적으로 신약개발에 열을 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약은 화학구조 또는 본질조성이 전혀 새로운 물질로 만들거나 그 신물질을 유효성분으로 함유한 의약품을 말한다. 선플라에 백금착체 항암제란 말이 붙는 이유는 분자구조의 중심에 있는 백금(Pt) 원자가 암세포의 DNA복제를 방해해 암세포 증식을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76년에 개발된 제1세대 시스플라틴(cisplatin)은 항암효과는 탁월하지만 독성이 너무 강해 부작용이 심합니다. 86년에 나온 제2세대 항암제인 카보플라틴(carboplatin)은 독성은 줄였으나 함암효과가 낮고 적용범위가 좁습니다. 제3세대 항암제인 플라주는 시스플라틴과 카보플라틴의 장점을 한꺼번에 갖춘 셈이죠.” 사실상 발매 첫해인 지난해에 플라주가 올린 매출실적은 30억원 정도이며 올해는 40% 늘어난 40억원을 예상하고 있다. 액수 자체는 크지 않지만 수입산인 1세대가 25억원, 2세대가 20억~25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발매1년만에 선두로 떠오른 셈이다. 또한 조만간 중국으로 수출될 전망이다. “우리나라가 70년대자동차와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당시 우리나라와 선진국간에 기술격차는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진국의 기술이전 기피 등 어려가지 어려움을 딛고 이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독종이니까요. 이에 비해 바이오 산업은 우리에게 정말 유리합니다. 선진국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으니까요. 우리 인투젠(김 박사가 현재 대표로 있는 바이오 벤처 기업)이 바이오 의약, 특히 암 치료ㆍ진단 분야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주는 기업으로 도약하는것도 결코 꿈만은 아닙니다.” 한국일보 2001.10.31[미래를 여는 사람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